2018 호주 워킹홀리데이 15

안녕

# 안녕 아무리 세상 모든 긴 이별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지만. 정말 갑작스러웠다. 한동안 뭐냐는 말만 반복하며, 가만히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다, 다시 한 번 믿어지지 않는 그 문장을 읽다,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다. 한참 뒤에야 그 사람이 이제는 영영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 이해했다. 처음 친해진 초겨울 어딘가 우연했던 새벽, 무언의 약속처럼 마주한 날들, 시시콜콜했던 농담들, 인사들, 웃음들.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도, 하나씩 꺼내보니 거짓말처럼 선명했다. 짧은 대화에도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직설적이었고, 진지했고, 솔직했다. 그 모습을 사람들은, 그리고 그 때의 나는 '재미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때 어쩌면 내가 감당하기엔 꽤나 무거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

두번째 겨울

# 겨울 준비 여기는 춥고, 또 비가 옵니다. 한국과 다르게 이 곳은 겨울에 우기가 시작되어 한동안 추위와 함께 비가 자주 내린다고 해요. 문득 비와 겨울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합니다. 비와 재즈, 푹신한 침대, 따뜻한 커피나 차, 이 모든 것들은 겨울에 더 잘 어우러지죠. 멀리서부터 받아 내던지듯 걸어두었던 코트들을 하나 둘씩 정리합니다. 물을 묻히고, 뜨거운 바람을 쏘이면 차츰 원래의 모습을 찾아 구김들이 사라지게 되어요. 아침 일찍 문을 나설 때마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올 때마다 피부에 닿았던 찬 공기가 떠올라 구석에 접어두었던 목도리도 눈에 보이는 곳에 꺼내놓습니다. 장갑은 왠지 챙기면 짐이 될 것 같아, 아직은 그 자리에 두고 옷장 앞에 잠시 서서 혹여 잊은건 없는지 한 번 더 생각해봅니..

[Canberra D+32] 뭉클데이

1. 오늘은 뭉클데이. 드디어! 엄빠가 보내준 택배를 받았다. 신기했다. 이 먼 곳까지 날아오다니! 짐들아 고생했어! 박스를 열기 전 꾹꾹 눌러 쓴 아빠의 글씨에 뭉클, 박스를 열자 내 물건들 열심히 꾹꾹 눌러 담았을 엄마의 손길에 또 뭉클, 선물(?) 사다준 무무 마음씨에 또또 뭉클. 그리고 한창 일 힘들어서 씩씩대고 있을 때 확인한 카톡에 뭉클. 안그래도 요새 제일 보고싶고, 그리운게 가족이어요. 나중에 한국 돌아가면 질리도록 사랑해줄거야. 흑. 매주 맛있는거 먹으러 다닐래. 매 계절마다 좋은 곳으로 놀러갈래. 기다려줘!!! 2. 손에 또 지랄(?) 났다. 내 몸 중에 제일 좋아하는 부분 손인데, 내 몸 중에 제일 고생하는 부분도 항상 손이다. 불쌍해죽겠다. 다행히 마침 짐이 도착해줘서 약을 바를 수..

[Canberra D+30] 배부르다!

1. 하하. 일주일에 한두번밖에 안가는 매장에 안경 놓고왔다! ㅋㅋㅋㅋㅋ 불편하다. 이번주 거기 출근할 일 없는데... 찾으러가긴 너무 귀찮고... 일주일만 참아야지... 2. 세계인(?)들과 함께하는 영어클럽...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어제는 거기에 다녀왔다. 거기서 변태 오지남과 오만한 중국남을 만났는데, 정말 별로였다. 그리고 거기서 한국인, 일본인 대학생 여자애랑 멜번에서 온 아시아계 호주인도 만났다. 거기서 만난 한국인 대학생 친구는 친절했는데, 내게 다른 영어클럽과 다른 일자리(ㅋㅋㅋ)정보를 보내줬다. 내가 일하는 카페 이름을 듣고 혀를 내두르며 "Slave!"라 하던 모두의 반응을 잊을 수가 없다. 빨리 도망가야겠다. 헤어지기 전 서로 다음주에도 나올거냐며 묻는데, 뭔가 색다르게 설렜다. 아..

[Canberra D+26] 서러워 서러워

1. 달을 봤다. 달 봐야지, 해놓고 잊고 있었는데. 터덜터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상태로 집에 돌아오는 길 손톱달이 뙇! 눈에 들어왔다. 일 끝나고 악기점 들러서 사진 왕창 찍어야지, 하고선 챙겼던 카메라로 이 날은 달만 담았다. (너무 예쁘다-) 누군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나요?' 물으면 한참 고민하다 끝내 대답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많았는데, 이젠 대답해낼 수 있다. "2018년 5월이요!". 정말이지. 이렇게 자존감 뚝뚝 떨어지는 기분 오랜만에 느껴본다. 딱히 탄탄하게 살고 있진 않아도, 특출나게 잘하는게 없어도 이만큼이나 내가 모자라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요즘의 난 정! 말! 최악이다!!! 하.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이 해결해줄거라고 건네는 위로가 저주처럼 느껴진 적도 처음이..